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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눌거리/■ 생각

30년간 불꽃이었던 사람, 전혜린 :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by 취하는 이야기 2020.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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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을 꽤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전혜린’을 알 것이다. 소위, 불꽃같은 인생을 산 것으로 묘사되는데 아마도 삼십 세 초반의 나이로 요절한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감수성 넘치던 고등학생 시절, 시험이 진행 중인 가을철 마른 잎 같은 날이었다. 빌어먹을 모의고사는 일주일에 두 번이나 보는데 복습할 시간도 없이 풀어제끼기만 하니, 실력향상은 먼 나라 이야기인지 오래. 그렇게 시작된 1교시 언어영역에서 ‘전혜린’을 만난다. 문학작품의 한 지문으로 등장해, 아래에 3문제가 딸려 있었는데, 이게 웬걸. 눈물이 나려 하고 심장박동이 빨라진다. '먼곳에의 그리움'이었다.

 

  그 날 전혜린을 찾으며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라는 책을 사게 된다. 그 책은 작가가 기획한 작품이 아니다. 살아오며 느낀 것에 대한 생각들, 아이를 낳고 키우며 쓴 일기와 편지 등을 엮은 것이다. 사실 그녀의 삶에 업적은 없다. 그러나, 글을 읽으면 사유의 깊이가 뼈를 파고드는 것이 느껴진다. 1934년에 태어난 그녀가 독일에 유학을 다녀왔다는 것, 관념과 사유 속에서 헤엄치다 요절한 것은 가끔 조롱거리가 되기도 한다. 나는 먹을 빵도 없는데 행복이 겨워 넘쳤구나.

  죽음이 자살이라면 어떠한 이유로도 미화할 수 없다. 더욱이 사랑하는 자식을 두고 떠나는 사람은 무책임하단 화살만 받아내야 한다. 그러나, 그녀는 아직 우리 곁에 있다. 많은 이의 입과 기억을 통해 살아 숨 쉰다.

 

 

  내가 구입했을 당시 책의 표지는 짙은 회색이었다. 맞다. 그 책을 보고 있노라면 길가, 그것도 아스팔트 위에 죽어있는 새 한 마리가 생각난다. 바람이 불 때 움직이지 않는 것은 죽은 것이라 했던가. 이 책에서는 그 새의 냄새가 난다. 벌어진 부리와, 화려한 깃털을 가졌지만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새.

 

  슬프고 우울한 것을 함께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 번쯤 내가 짊어진 삶의 무게, 인생이라 불리는 희비쌍곡선에 대한 진지한 고민들에 대해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거울 속 나와 대면하는 시간이다. 모든 세상일을 덮고, 나라는 존재로, 그 심연의 늪으로 한 번쯤 가보고 싶은 분께 추천드리고 싶은 책,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혜린

 

 

<먼 곳에의 그리움>

 

 그것이 헛된 일임을 안다.

 

  그러나 동경과 기대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무너져 버린 뒤에도 그리움은 슬픈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나는 새해가 올 때마다 기도드린다.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게 해 달라고… 어떤 엄청난 일, 무시무시하도록 나를 압도시키는 일, 매혹하는 일. 한마디로 나는 '기적'이 일어날 것을 나는 기대하고 있다. 올해도 마찬가지다. 모험 끝에는 허망이, 여행 끝에는 피곤만이 기다리고 있는 줄은 안다.

 

  그리움과 먼 곳으로 훌훌 떠나 버리고 싶은 갈망. 바하만의 시구처럼 '식탁을 털고 나부끼는 머리를 하고' 아무 곳이나 떠나고 싶은 것이다. 먼 곳에의 그리움(Fernweh)! 모르는 얼굴과 마음과 언어 사이에서 혼자이고 싶은 마음! 텅 빈 위(胃)와 향수를 안고 돌로 포장된 음습한 길을 거닐고 싶은 욕망. 아무튼 낯익은 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모르는 곳에 존재하고 싶은 욕구가 항상 나에게는 있다.

 

  포장마차를 타고 일생을 전전하고 사는 집시의 생활이 나에게는 가끔 이상적인 것으로 생각된다. 노래와 모닥불가의 춤과 사랑과 점치는 일로 보내는 짧은 생활, 짧은 생. 내 혈관 속에는 어쩌면 집시의 피가 한 방울 섞여 있을지도 모른다고 혼자 공상해 보고 웃기도 한다.

  내 영혼에 언제나 고여 있는 이 그리움의 샘을 올해는 몇 개월 아니, 몇 주일 동안 만이라도 채우고 싶다. 너무나 막연한 설계 - 아니 오히려 '반설계(反設計)'라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플랜은 그것이 미래의 불확실한 신비에 속해 있을 때만 찬란한 것이 아닐까? 이루어짐 같은 게 무슨 상관있으리오? 동경의 지속 속에서 나는 내 생명의 연소를 보고 그 불길이 타오르는 순간만으로 메워진 삶을 내년에도 설계하려는 것이다.

 

 아름다운 꿈을 꿀 수 있는 특권이야말로 언제나 새해가 우리에게 주는 아마 유일의 선물이 아닌가 나는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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